푸른 장미의 주인 001화
델마르크 공작저의 거대한 철문 앞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어딜 함부로 발을 들이려 하느냐.”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억센 손아귀가 아이린의 어깨를 밀쳐냈다.
“이곳이 어느 가문인 줄 알고 평민 쓰레기가 감히 기웃거려!”
엘레나 후작 부인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는 정문 경비병들을 뒤로 물리고 직접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아이린은 밀려난 반동으로 짧게 비틀거렸으나 곧바로 중심을 잡았다.
“정당한 고용 절차를 밟고 온 길입니다.”
“고용?”
“델마르크 가문에서 너 같은 천것을 정원사로 들인다고?”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아이린의 품에 들린 짐보따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앗, 돌려주세요!”
사내는 대답 대신 보따리를 허공에서 거꾸로 쥐고 마구 흔들었다.
흙 묻은 작업복과 장갑, 낡은 가죽집에 든 원예 도구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쇳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진 모종삽이 사내의 구두 끝에 부딪혔다.
“이딴 잡동사니를 무기랍시고 숨겨 온 것은 아니겠지?”
“식물을 다루는 도구일 뿐입니다.”
“내 눈에는 불순한 의도를 품은 침입자의 도구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사내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꾸며내며 바닥에 떨어진 가죽 장갑을 군화 발로 짓밟았다.
주변에 도열한 다른 하수인들이 낄낄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아이린은 맑은 녹색 눈동자로 짓밟힌 자신의 도구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거나 억울함을 토로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공작저 안뜰, 굳게 닫힌 쇠창살 너머의 비밀 정원에서 희미한 썩은 내가 풍겨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흙이 죽어가며 내뿜는 병적인 기운이었다.
장미의 뿌리가 말라비틀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아이린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바닥에 흩어진 도구들을 주워 모았다.
“비키지 않으면 무력으로 제압하겠다.”
“제압하기 전에 이거나 먼저 확인하시죠.”
아이린은 모종삽을 챙겨 품에 안은 뒤, 안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델마르크 공작가의 문장이 선명하게 찍힌 정식 임시 고용장이었다.
“오늘부로 공작저의 임시 고용 정원사로 발령받은 아이린 베리입니다.”
사내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억센 손길로 아이린이 내민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서류의 진위 따위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는 듯 훑어보는 시늉조차 대충이었다.
“임시 고용장이라.”
사내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런 종이 쪼가리는 위조하기 십상이지.”
“공작 직속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하수인 신분으로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문서일 텐데요.”
“하수인?”
“말조심해라.”
“나는 차기 가주가 되실 엘레나 후작 부인명으로 이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사내는 보란 듯이 서류를 반으로 찢었다.
아이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북북 찢긴 종이 조각들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찢어진 고용장은 지난밤 비에 고인 진흙탕 속으로 처박혔다.
“무슨 짓이죠?”
“보지 않았느냐?”
“위조 문서를 폐기했을 뿐이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붉은 왁스 인장이 시커멓게 얼룩졌다.
사내는 구두 굽으로 진흙 속에 처박힌 서류를 비벼 뭉갰다.
“돌아가라.”
“천것이 운 좋게 공작의 눈에 띄었는지는 몰라도, 오늘로 끝이니까.”
“끝이라니요.”
“카시안 공작 각하께서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신다.”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뱀처럼 쉭쉭거렸다.
“이미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이시는 중이지.”
“후작 부인께서 임종을 지키기 위해 저택에 드셨다.”
그 말에 아이린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장미의 상태와 공작의 생명력은 동기화되어 있다.
흙에서 풍겨오는 썩은 내가 이토록 짙어졌다는 건, 저주받은 첫 번째 장미의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주인이 바뀔 저택에 네년이 파리 떼처럼 꼬일 자리는 없다.”
사내가 아이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조롱했다.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꺼져.”
아이린은 진흙에 짓이기고 있는 사내의 구두 끝을 응시했다.
예법도, 체면도 지금은 사치였다.
델마르크 공작의 호의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식물을, 그리고 그 식물과 연결된 사람을 방치할 수 없을 뿐이다.
“꺼지라는 말이 안 들려?”
사내가 손을 들어 올려 아이린의 뺨을 치려던 찰나였다.
아이린은 사내의 팔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사내의 다리 사이로 빠르게 빠져나가며 저택 안뜰을 향해 내달렸다.
“잡아!”
“저년 당장 잡아!”
뒤늦게 당황한 사내의 고함이 정문을 울렸다.
철갑을 두른 경비병들이 일제히 창을 교차하며 막아섰다.
아이린은 짐보따리를 미련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오직 주머니에 넣은 모종삽 하나만 손에 꽉 쥔 채였다.
“거기 서라!”
경비병의 거친 손이 아이린의 겉옷 자락을 스쳤다.
찌익 소리와 함께 소매가 찢어졌지만, 아이린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저택 서쪽 구석에 자리한 높은 담장으로 향해 있었다.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공작의 비밀 정원.
담장 틈새로 말라붙은 검은 넝쿨이 흘러내린 곳.
무거운 군화 발소리가 등 뒤까지 쫓아왔다.
“거긴 금지 구역이다!”
“당장 끌어내!”
아이린은 넝쿨이 얽힌 철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굳게 닫힌 줄 알았던 낡은 빗장이 그녀의 체중에 밀려 삐걱대며 열렸다.
정원 내부는 처참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잿빛으로 변해버린 흙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른 흙더미 중앙.
그곳에 잎사귀가 전부 떨어져 나가고 앙상한 가시만 남은 푸른 장미의 줄기가 있었다.
카시안 폰 델마르크의 생명과 직결된 저주의 꽃.
아이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장미 앞으로 다가갔다.
뒤따라온 하수인들이 정원 입구로 들이닥쳤다.
“미친년이 기어코...”
“당장 끌어내서 매질을 해라!”
아이린은 그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딱딱하게 굳은 흙은 돌덩이나 다름없었다.
모종삽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흙을 찍어 내렸다.
깡!
마찰음과 함께 손아귀가 저릿하게 울렸다.
“흙이 숨을 못 쉬고 있어.”
저주가 흙의 수분과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들인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도구를 써도 뿌리까지 닿기 전에 장미가 먼저 죽는다.
“잡아끌어!”
누군가 아이린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두피가 뜯겨 나갈 듯한 고통이 번졌지만, 아이린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버텼다.
그녀는 모종삽을 내던지고 맨손으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독한 년, 손을 짓밟아버려!”
발길질이 옆구리에 꽂혔다.
윽, 짧은 신음이 터졌으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갈라진 흙덩어리에 긁혀 손톱이 뭉텅 깨져 나갔다.
손가락 끝에서 배어 나온 붉은 피가 검은 흙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아픔보다 다급함이 앞섰다.
“조금만, 조금만 더 열려라...!”
아이린의 집요한 파헤침에 드디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뿌리의 일부가 드러났다.
바싹 말라 껍질이 벗겨진 가여운 뿌리.
아이린은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그 뿌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타인의 상처를 살피듯, 가장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놔, 놓으라고!”
하수인들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억지로 끌어올리려 했다.
아이린은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 부근에서 고동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순환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땅에 맥박을 불어넣는 작업.
정원사로서 생명을 대하는 가장 순수한 열망.
따뜻하고 옅은 녹색 빛이 아이린의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 마력은 피에 젖은 흙을 거쳐 말라비틀어진 장미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하수인 하나가 기겁하며 손을 뗐다.
뿌리에 닿은 마력이 흙 속에서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쩍쩍 갈라져 있던 흙덩어리들이 부드럽게 바스러지며 습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마력의 출력을 높였다.
“죽지 마.”
“아직 살 수 있어.”
그녀의 단호한 속삭임이 정원의 탁한 공기를 갈랐다.
변화는 극적이었다.
바스라지기 직전이던 잿빛의 첫 번째 줄기에 푸른 혈관 같은 선이 떠올랐다.
툭, 투둑.
말라붙은 겉껍질이 허물을 벗듯 떨어져 나갔다.
“저, 저거...”
“줄기가...!”
끌어내려던 사내들이 멈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푸른 선을 따라 생기가 차오른 줄기는 빠르게 위로 뻗어 나갔다.
가시가 돋친 마디 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더니, 뾰족하고 싱그러운 새순이 움텄다.
새순은 짙은 푸른색을 띠며 고고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정원을 가득 채우던 썩은 내가 순식간에 물러가고, 서늘하면서도 맑은 장미 향이 훅 끼쳤다.
아이린은 그제야 거칠었던 호흡을 고르고 손에서 힘을 뺐다.
핏방울이 맺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새순이...”
“돋았어.”
하수인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주를 상징하는 꽃이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누구도 감히 아이린에게 다시 손을 대지 못했다.
같은 시각,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저택 3층의 발코니.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엘레나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쿨럭, 커흑...!”
그 앞 휠체어에 주저앉은 카시안이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었고, 손등을 덮은 검은 저주의 반점은 목덜미까지 기어 올라가는 중이었다.
“안타깝군요, 공작.”
“이렇게 허망하게 가문을 남겨두고 가시다니.”
엘레나는 거짓된 동정을 꾸며내며 카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카시안은 서늘한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려 했으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고개를 꺾었다.
“의원들은 이미 포기했습니다.”
“편히 눈을 감으세요.”
엘레나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지던 그 순간이었다.
카시안의 몸이 흠칫 굳었다.
“커...”
“헉...?”
목구멍을 찢을 듯이 솟구치던 기침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거칠게 요동치던 그의 가슴팍이 느릿하고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기 시작했다.
엘레나의 미소가 차갑게 굳어졌다.
“공작?”
카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기가 돌기 시작한 그의 창백한 손등에서, 끔찍하게 얽혀 있던 검은 저주 반점이 썰물처럼 옅어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엘레나는 당황하며 들고 있던 부채를 꽉 쥐었다.
발코니에 대기하던 수하들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점이...”
“반점이 사라집니다!”
“의원!”
“당장 의원을 다시 불러라!”
소란스러운 주변을 무시한 채, 카시안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고통으로 흐려졌던 시야가 맑아졌다.
가시덩굴로 옥죄는 것 같았던 심장의 압박감도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그는 이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미약하게 열린 발코니 문틈 사이로, 아주 낯설고도 맑은 향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차갑고 서늘한, 그러나 묘하게 안식을 주는 푸른 장미의 향기.
카시안은 휠체어의 팔걸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공작,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엘레나가 다급히 손을 뻗었으나 카시안은 그 손을 차갑게 쳐냈다.
그는 핏자국이 남은 입가를 소매로 대충 닦아내며 발코니 난간으로 다가갔다.
시선이 향한 곳은 저택 서쪽의 비밀 정원이었다.
발코니 아래 정원 입구에는 엘레나의 하수인들이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흙투성이가 된 여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찢어진 소매 사이로 멍든 팔이 보였고,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저 여자는 대체 누굽니까?”
뒤따라 다가온 엘레나가 난간을 짚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오직 정원 한가운데 피어난 작은 새순과, 그것을 지켜낸 여자의 굳건한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린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흙이 묻은 손끝에서 알싸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안도감이 스쳤다.
숨통이 트인 장미는 이제 당분간 말라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하수인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려 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공작의 상태가 회복되었다면, 이 정원의 상태를 건드린 자가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몰랐다.
아이린은 그들의 동요에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선 흑발의 남자.
창백한 얼굴과 서늘한 눈매가 저주받은 장미의 주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린은 그와 정확히 시선을 맞추었다.
두려움이나 굴복의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목례를 표했다.
델마르크 공작가의 정식 고용인으로서 첫인사를 건네듯, 건조하고 명확한 어조가 정원에 울렸다.
“임시 고용 정원사 아이린 베리입니다.”
“방해물은 치워두었으니, 이제 업무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